은정 씨가 천사처럼 홀연히 나타나니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마침, 손님은 하나도 없고, 미스 K 혼자서 빈 식당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음악을 듣고 있었다. 알바생은 이미 퇴근했다. 혼자서 심심하던 차에 K 교수가 방문하니 미스 K는 반갑게 맞아준다. 손님이 없더라도 12시가 넘어서 식당 문을 닫는다고 한다. 미스 K의 숙소인 K리조트는 식당에서 3분 이내 거리에 있다. 이해가 된다. K리조트 방에 가봐야 기다리는 사람도 없이 썰렁할 것이다. 차라리 식당에서 마무리 일을 하면서 음악이라도 듣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K 교수 입에서 술 냄새가 나는 것을 알아채고서 미스 K가 묻는다. “술 드셨어요?” “네, 서울에서 열린학회 모임에 갔다 오는 길입니다. 1차로 저녁식사, 2차는 맥주, 3차는 노래방 가서 최신곡을 세 곡이나 불렀답니다.” “운전은 어떻게 하셨어요?” “나는 모범생이잖아요. 모범택시를 타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택시를 1시간 동안 문밖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 택시를 돌려 보내세요. 이따가 제 차로 집에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러지요 뭐. 잘 되었네요. 오늘은 일진이 좋은 날인가 봐요.” K 교수는 택시요금을 내고 모범택시를 돌려보냈다. “술은 더 못 하겠고, 따뜻한 허브차를 마시고 싶네요. 캐모마일 허브 차가 있나요?” “네, 있어요. 저는 포도주를 한 잔 마실게요.” “그러면 저도 포도주를 주세요. 포도주는 제가 사지요.” 두 사람의 포도주잔이 마주쳤다. 잔이 부딪치면서 작지만 맑은 쨍 소리가 났다.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의 <음주 찬가>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우리가 죽기 전에 알아야 할 진리의 전부다. Wine comes in at the mouth And love comes in at the eyes. That’s all we shall know for truth Before we grow old and die. 술이 이미 취한 K 교수의 눈에는 미스 K가 아름다운 선녀처럼 보였다. 선녀가 말했다. “교수님, 제 머리가 어색하지 않아요? 미장원에 갔다가 깜박 잠이 들었는데, 그만 아가씨가 너무 짧게 깎아서 할 수 없이 커트했어요. 아이 속상해.” “내가 보기에는 오드리 헵번처럼 훨씬 젊어 보이고 좋은데.” “교수님이 좋게 봐주시니까 그럴 거에요.” “분명한데. 훨씬 건강해 보이고 젊어 보이는데.” K 교수는 지금까지 쓰던 존댓말에서 조금 낮추어 말했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술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완전 반말은 아니고, 그렇지만 존댓말은 분명 아니었다. 때는 자정을 훨씬 넘긴 깊은 밤이었다. 식당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나뭇잎 살랑거리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사방이 조용했다. 적막공산 속에서 짐승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40대 중년 남녀의 대화는 가식이 없이 솔직했다. 남자는 이미 술에 취한 상태였고, 여자는 포도주 한 잔을 마셨다. K 교수는 미스 K를 때로는 사장님이라고 했다가 때로는 은정 씨라고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올렸다가 내렸다가, 들었다 놨다 하면서 K 교수는 재미있게 대화를 이어갔다. 간간이 예쁘다는 말로 추임새를 넣어가면서 말이다. 시간은 머무르지 않고 계속 흘러갔다. 갑자기 K 교수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런데, 내가 술김에 은정 씨에게 고백을 하나 해야겠네.” “긴장되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은정 씨를 괜히 만난 것 같아.” “ . . . ” “내가 50 가까이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은 이상적인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요소 중에서 한 가지 또는 두 가지만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미모와 지성미, 그리고 건강미 이 세 가지가 이상적인 여성의 3요소라고 생각해요. 우리 마누라는 지성미와 건강미를 갖추었는데, 미모는 좀 떨어집니다. 옛날에 하마터면 구혼할 뻔했던 여성은 미모와 지성미는 갖추었지요. 그런데 몸이 좀 약해서 병치레를 자주 할 것 같아서 막판에 헤어졌습니다. 술집 아가씨들은 대개는 미모만 뛰어나지요. 서울대에 입학한 여학생들은 대부분 지성미가 돋보이고요. 체육대학 여학생들은 건강미 한 가지는 끝내주지요. 그런데 미모와 지성미, 그리고 건강미를 다 갖춘 은정 씨가 내 앞에 천사처럼 홀연히 나타나니, 내가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지요. 사실은 나도 지조가 있는 남자인데, 예쁜 은정 씨 앞에서는 지조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아요. 공든 탑이 무너지듯이 ... Understand?” K 교수가 취한 것은 분명하다.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영어까지 튀어나온다. 그렇지만 미스 K도 호락호락한 여자는 아니었다. “호호호 ... 교수님도 ... 취하셨나봐. 저를 과대평가하지 마세요. 저 보통 여자에요.” “아니라니까. 엄연한 사실이고 감출 수 없는 진실이라니까. 당신은 천사라니까. 은정 씨 때문에 내가 심쿵하다니까.” “호호호 ... 그런 이야기는 다음에 해요. 호호호...” “일단 고백을 했으니까. 그러니까 공은 그쪽 코트로 넘어갔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 . . . ” “ . . . ”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침묵이 어색하지는 않았다. 사람의 감정은 말하지 않아도 표정에 나타나는 법이다. 미스 K를 살펴보니 당황하거나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K 교수가 화제를 바꾸었다. 술이 조금 깼는지, 말투는 존댓말로 돌아왔다. “다른 이야기 좀 합시다. 홍신자라고 아세요?” “네, 전위 무용가 말씀이시죠?” “맞아요. 홍신자가 경기도 안성군 죽산면에 ‘웃는 돌’이라는 연극단을 만들었는데, 그곳에서 국제예술제를 한답니다. 여기 초대권이 있는데 시간이 있으면 같이 가실래요?” “죽산에는 작년에 한 번 갔습니다. 주변 환경은 좋은데, 무용 자체는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무용에도 관심이 있군요.” “그럼요. 제가 이래 봬도 무용과를 졸업했는데요.” “아, 그러세요. 은정 씨가 무대에서 춤추는 모습을 보고 싶네요.” “글쎄요. 이제 저도 이십대 꽃다운 나이는 지났는데... 요즘 젊은 애들 참 예쁘지요?” “내 눈에는 은정 씨가 더 예뻐 보이는데.” “아이, 참. 교수님은 바람둥이처럼 말씀하셔. 호호호.” “나는 바람하고는 관계없는 사람인데요. 나는 물을 공부했습니다. 수질을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내 친구들은 모두 나를 물박사라고 불러요. 하하하.” “그러세요? 물박사님! 호호호...” “웃는 돌 공연 입장권을 2장 드릴 테니, 나하고 가기 싫으면 다른 사람하고 가세요.” “입장권은 일단 받아둘게요. 감사합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