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기사
-
절에 온 이를 세심하게 챙겨주는 나주 '불회사'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竹影掃階塵不動 月輪穿沼水無痕 죽영소계진부동 월륜천소수무흔 댓잎 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먼지는 그대로요,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 흔적은 남지를 않네. 智慧存於明者心 如淸水在於深井 지혜존어명자심 여청수재어심정 지혜는 밝은 사람 마음에 있는데, 마치 맑은 물이 깊은 샘에 있는 것과 같다네 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 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 삼일동안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 백일동안 탐한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로다. - 나주 불회사 주련 해석- 한가위 성묫길이 막힐 듯하여 지난주에 한발 빠른 성묘를 마치고 지방에 내려간 김에 나주 불회사(佛會寺)에 들렸다. 특별히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고건축을 전공한 남편 덕에 고건축물인 절 답사길에 따라나선 지도 어느덧 30여 년이 훌쩍 넘는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라고 이제 고찰(古刹)이면 고찰, 서원(書院)이면 서원 등 나름의 보는 안목이 생겼다고 자부심(?)을 가질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문가 수준의 안목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른바 촉감(觸感)이란 것은 나름 축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온 나라의 명찰(名刹)ㆍ고찰(古刹)을 드나들며 유심히 보게 되는 것은 절의 규모나 연륜보다는 절을 찾는 이들에 대한 배려심이 얼마나 큰가를 살피는 일이다. 불회사처럼 어려운 주련(柱聯: 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서 붙이는 글귀. 주로 한시(漢詩)의 연구(聯句)를 써놓음)을 해석해 주고 있다던가, 요즘 같은 가을이면 활짝 핀 국화 화분 몇 개라도 내놓는다든지, 추운 겨울철이면 따뜻한 난로가 있는 종무소에 들러 몸을 녹일 수 있도록 손님용 의자를 놓아둔다든지 등등 신도가 아니더라도 절을 찾는 이를 위한 배려를 찾아보는 일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교회도 그렇지만 절에도 이른바 카페가 유행처럼 번져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문제는 이런 카페에서 다루는 차 종류들이 시중가 못지않게 비싸다는 점이다. 비싸면 안 사 먹으면 그만이겠지만, 절 순례를 하다 보면 다리도 아프고 몸도 지쳐 잠시라도 쉬고 싶어지는데 절 안에는 카페시설 말고는 딱히 쉴만한 공간이 없는 곳이 많다. 절 경내에 그 흔한 긴의자 하나 없다. 갈수록 그런 느낌을 받다가 만난 불회사의 무인 찻집인 ‘비로찻집’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정갈한 찻잔과 잔받침, 찻주전자, 물식힘사발, 차선, 차칙(찻잎을 뜨는 대나무 숟가락) 등이 갖춰져 있고 ‘비로약차’까지 갖춰져 있었다. 친절하게도 비로약차를 어떻게 타야하는지도 잘 설명해 놓고 있었고 무선주전자에는 방금 누군가 코드를 꼽아 차를 타기 딱 좋은 물의 온도로 맞춰 놓았다. 두리번거려보았지만, 찻집 안에는 아무도 없다. 누군가 방금 차를 마셨는지 개수대에 찻잔을 씻어 정갈하게 엎어둔 모습이 인상 깊다. 고요하고 정갈하여 사색하기 좋은 찻집을 나주의 불회사에서 만나다니... 아주 감동적이었다. 집이 가깝다면 이 절의 신도가 되고 싶은 마음마저 일었다. 누군가 나주에 가거든 반드시 불회사의 비로찻집에 가보라고 권하고 싶을 정도다. 몇 해 전 겨울 나는 천년고찰 **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 때는 2월 말이었지만 날은 추웠고 잠시라도 몸을 녹일 공간은 없었다. 마침 종무소가 있기에 문을 빼꼼하게 열고 잠시 들어가도 되느냐고 묻고 보니, 은행 창구처럼 만들어 놓은 종무소 안쪽에서 여직원이 무슨 용무냐고 묻는다. 둘러보니 앉을만한 의자 하나 없다. 그냥 멋쩍어 ‘이 절의 홍보물이 있으면 하나 달라’고 하니 인터넷을 찾아보라고 해서 알았다고 하고 나온 기억이 난다. 나는 찻주전자에 비로약차(榧露藥茶: 비자나무 아래서 이슬을 머금고 자란 찻잎을 일곱가지 약재와 함께 만든 발효차)를 우려내어 천천히 마셨다. 지난 30여 년 동안 찾아갔던 수많은 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30여 년 전보다 절의 전각은 커졌고 규모도 커진 것 같지만 정작 절을 찾는 이들이 쉴만한 공간은 늘지 않는다. 유료 찻집만 늘어나는 추세다. 그런 상황에서 불회사의 비로찻집은 신선했다. 물론 이곳이 완전히 무료는 아니며 찻값은 자기가 알아서 보시함에 넣게 되어있다. 불회사에서 느낀 두 가지를 말하려다가 이야기가 길어졌다. 하나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주련에 대한 해설을 해두고 있는 점과 또 다른 하나는 정갈한 무인 찻집을 만들어 절을 찾는 이라면 누구나 이용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음수사원, 굴정지인(飮水思源, 掘井之人)’이라는 말이 있다. ‘물을 마실 때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고 우물을 판 사람을 생각하며 마셔야 한다’라는 뜻이다. 나는 비로찻집에 앉아 이런 아름다운 찻집을 만든 이가 누굴까를 상상해 보았다. 그 배려심에 고개가 수그러들었다. 나주시청 문화관광과에서는 천년고찰 불회사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다. “백제 침류왕 시기인 384년 인도 고승 마라난타가 해로를 통해 들어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며, 중국차의 한국 전래지로 천년이 넘은 전차(錢茶)의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 한국 차문화를 상징하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또한 대웅전ㆍ건칠비로자나불좌성ㆍ석장승 등 많은 문화유산이 보존되어 있는데, 대웅전 뒤편의 동백나무숲과 국가 보호림인 비자나무숲이 유명하다. 불회사는 ‘춘불회추내장(春佛會秋內藏) 곧 봄에는 불회사, 가을에는 내장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경치가 아름다운 절이다.” * 불회사(佛會寺) * 전남 나주시 다도면 다도로 1224-142 * 061-337-3440
-
교과서에는 없는 정조 암살 미수 사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조선 이야기. ‘교과서’로 만난 역사는 참 딱딱한 적이 많았다. 과정은 생략되고, 연대와 결과 위주로 건조하게 서술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 보니 가장 싫어하는 과목으로 ‘역사’를 꼽는 학생들도 적지 않고, 역사에 흥미를 잃어버린 채 성인이 되어서도 역사책은 전혀 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지은이 정명섭은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조선사건실록》을 통해 결과만을 보여주는 교과서, 지루한 암기 과목이 되어 버린 ‘역사’라는 과목에 대한 편견을 없앤다. 교과서에 간단하게 나오는 사건의 이면을 자세히 보여주며 역사는 한 편의 드라마, 박진감 넘치는 서사를 가진 생생한 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책에는 ‘불패의 장수, 이성계’로 시작해 ‘멸망의 전주곡, 고종의 춘생문 사건(1895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6개의 사건이 실려있다. 지은이의 속도감 있는 필력 덕분에 역사가 이토록 재밌는 것이었는가 새삼 감탄하며 책장을 넘기게 된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존현각 정조 암살 미수 사건(1777년)’이다. 조선 임금에 대한 은밀한 독살 시도나 반란은 많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자객으로 암살을 시도했던 사건은 정조가 유일했다. 정조가 워낙 냉철하고 침착한 성격이었기에 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하마터면 일국의 임금이 밤에 침입한 자객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천만한 사건이었다. (p.149) 정조 1년인 1777년 7월 28일, 두 암살자는 정조가 밤늦도록 책을 읽고 있던 존현각까지 도달한다. 조선 왕조 역사상 암살자와 임금이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던 적은 없었다. 강계창이 그날 편전의 중문인 차비문을 지키며 숙직했기 때문에 쉽게 길을 안내해 줄 수 있었다. 그런데 존현각 지붕까지 올라간 두 사람이 한 일은 대단히 괴이했다. 기와에 모래를 뿌리고 지붕을 이리저리 뛰어다닌 것이다. 언뜻 보면 귀신이 날뛰는 것처럼 보였는데, 아마 정조가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오게 할 목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손 시절부터 위협에 시달린 정조는 섣불리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정조는 촛불을 끄고 조용히 기다렸다. 소란을 떨어도 존현각에서 반응이 없자 자객들은 그만 당황해서 도망치고 말았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도승지 홍국영은 경희궁 안팎을 수색했지만 자객들은 이미 궁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한 뒤였다. 자객들은 존현각에서 첫 번째 암살을 시도한 지 보름이 지난 8월 11일 밤, 대담하게도 두 번째 암살을 시도한다. 그러나 어설프게 궁궐 담장을 넘어가려다 궁을 지키던 장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체포된 자객 전흥문은 신문을 받자, 암살의 배후를 털어놓았고, 배후에 있던 홍상범과 관련자들은 모두 체포되어 역모죄로 처벌받았다. 암살의 공식적인 배후였던 홍상범은 홍계희의 손자로, 1726년 경기도 관찰사로 있던 홍계희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발해서 죽음에 이르게 한 전력이 있었다. 손자인 홍상범이 보기에 정조의 즉위는 곧 가문의 몰락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아버지 홍술해가 황해도 관찰사로 있다가 국고를 횡령했다는 혐의로 흑산도에 유배를 가자 마침내 정조를 암살하기로 결심한 그는 자객을 물색했다. 그때 눈에 띈 사람이 천민 출신으로 힘이 장사인 전흥문이었고, 그를 자신의 여종과 혼인시키고 돈을 두둑하게 챙겨준 뒤 일을 꾸민 것이다. 한편, 사건마다 수록된 ‘쓸모 있는 조선잡학사전’에서는 교과서에 나오는 주요 사건들의 배경을 소상히 풀이해 이해를 돕는다. 정조 편에서는 허가받지 않고 물건을 파는 상점인 ‘난전’을 금하는 ‘금난전권’과, 이를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다룬다. 조선은 국가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광화문 육조거리 앞에 행랑을 수백 채 지어 가게를 운영하도록 했다. 이 가게들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인다고 해서 ‘운종가’라고 불렀다. 운종가 상인들 외에 허가받지 않고 물건을 파는 가게를 ‘난전’이라고 불렀는데, 운종가 상인들이 난전의 확산에 크게 반발하자 운종가 상인들에게 ‘금난전권’을 주어 도성과 도성 인근 10리 안에서 난전을 금하도록 했다. 특히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여섯 가지 물품을 다루는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가장 강력했다. 그러나 정조 시기 금난전권 시행이 상업의 발달을 가로막고, 상품 독점권을 가진 운종가 상인들이 높은 값을 고수해 백성들의 부담이 커진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금난전권을 철폐하는 ‘신해통공’을 실시하게 되었다. (p.155) 결국 정조 15년인 1791년,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들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백성들의 부담을 낮추는 측면도 있었지만, 당시 운종가 상인들이 주로 노론의 유력 가문과 손잡고 그들에게 자금을 대는 역할을 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즉,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세력에 대한 반감이 작용한 한편 탕평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노론의 자금줄을 차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해통공의 배경이 정치세력의 자금줄 차단이라는 해석은 상당히 일리 있으면서도, 단순히 결과만을 볼 때보다 심오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교과서만 봤을 때 쉽게 하기 어려운 분석을, 쉽고 친근하게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조선의 주요 사건들을 돌아보며 조선 역사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조선의 운명을 결정한 16가지 사건’이라는 부제처럼, 역사의 주요 마당을 장식한 사건들을 살피다 보면 미래를 예측하는 통찰력도 함께 기를 수 있다. 교과서에서는 쉽게 알 수 없는, 건조한 줄글 사이의 행간을 보여주는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