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오존은 냄새가 나는 푸르스름한 기체이다. 복사기를 돌렸을 때 진하게 느껴지는 냄새, 그리고 식당에 있는 자외선 살균기를 열었을 때 나는 비릿한 냄새가 오존 냄새다. 그리스어로 냄새라는 뜻의 ‘ozein’에서 ‘ozone’이라는 영어 이름이 생겼다. 산소 원자가 두 개 결합하면 산소 분자가 되며 ‘O2’라고 표시한다. 오존은 산소 원자가 세 개 결합된 분자로서 ‘O3’라고 표기한다. 오존은 공기 1리터 속에 1/30만 들어있어도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사람의 후각은 이 오존에 예민하다고 알려져 있다. 오존은 살균제나 표백제로도 쓰이는데, 인체에는 해로운 기체다. 산소 분자가 햇빛의 자외선을 받으면 일부가 오존으로 변한다. 지구가 생겨나고 처음 원시 대기에는 산소도 오존도 없었다. 약 30억 년 전에 첫 생물체인 남조류가 바다에서 나타났다. 남조류의 광합성에 의해 산소 분자가 만들어지고 대기 속에 산소가 많아지자, 오존이 나타나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4억 년 전부터 지금까지 현재의 오존 농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다. 바다에서 나타난 생명체는 오랫동안 육지에 상륙하지 못하였다. 햇빛의 자외선이 너무 강해서 생명체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그의 어깨는 더없이 무거워 보였다. 저 가녀린 허리가 버텨낼 수 있을까 싶은 정도였다. 희뿌연 하늘에 눌려서도 아닌 것 같고, 둘러매고 있는 전기기타의 무게 때문도 아닌 것 같았다. 워낙 비실비실한 체질이란 게 한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이제 연락하지 마라. 네 마음 안다. 고맙다. 그저 바람 따라 떠다니다 때 되면 갈란다.“ 금방이라도 양회가루가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낮은 구름에 온갖 매연까지 뒤섞인 바람이 빛을 잡아먹고 있었다, 그가 골목 끝자락에 다다르기도 전에 이미 그의 실루엣은 대기에 스며들고 말았다. 태민호! 어쩌면 그에게는 태민호라는 이름을 얻기 전, 그러니까 장효민이라는 이름으로 살 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는지 모른다. 그의 집은 비록 서울의 사대문 안은 아니었지만, 문안과 가까운 곳에 있었고, 번듯한 양옥은 아니지만 여섯 식구 궁둥이 붙이기엔 부족함이 없을 정도에다 문간채의 방 두 개는 세를 놓을 정도의 살림은 되었다. 대학도 그가 음악에 빠져 안 간다고 버텨 그렇지, 돈이 없어 못 보낸 것도 아니었으니 60년대의 가정치곤 중류 이상은 되었다. 그는 중학생 때부터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꼼장어와 멸치회, 장어구이 등으로 유명한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의 죽성리라는 곳에 가면 일본식 성(城)의 흔적이 남아있다. 죽성리 왜성이라 불리는 이 성은 마을 해안가 가까이에 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조선ㆍ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남해안에 장기간 머물기 위해 돌로 쌓은, 둘레 약 960m, 성벽 높이는 약 4m의 성이다. 이곳은 원래 조선조 중종 때 왜구의 방어를 위해 두모포진(豆毛浦鎭)을 설치하고 성을 쌓았던 곳인데 왜군들은 이곳에서 두모포 진성 밖 더 너른 쪽에 왜성을 쌓고 그 옆 포구를 통해 조선 각지에서 잡아 온 도공들을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이 언덕받이에는 현재 소름요라는 도자기 가마가 있거니와 그 아래쪽에 무명도공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역사 속에 끌려간 도공들을 추념하기 위함이다. 납치된 도공들은 죽성리 포구에서부터 규슈 일대로 많이 실려 갔지만, 상당수는 바다 맞은 편에 있는 하기(萩)라는 곳으로 갔다. 당시 이곳의 영주인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돈독한 신임을 받아 8개 번(藩)을 이끄는 대장이 되기도 했고, 임진왜란 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26) 나는 몇 달을 더 못 살겠다.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말라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다 형들은 자중자애하여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조국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란다 평생 죄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히지 않을 뿐이다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란다 백정기 열사의 무덤 비문에 적힌 이 시는, 그가 숨을 거두기 전 동지들에게 남긴 말이다. ‘옛 무덤’이라고 하면 흔히 망자가 묻혀 있는 정적인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무덤 하나하나마다 이처럼 심금을 울리는 사연이 배어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라고 했지만, 그렇지만도 않다. 청동말굽이 쓴 책, 《옛 무덤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국사》는 그런 의미에서 더욱 특별하다. 책에 소개된 옛 무덤들은 그 자체로 죽은 이를 대변한다. 몇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책은 크게 ‘나라를 세운 왕들의 무덤’, ‘위기 앞에서 용기를 보여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퇴계 이황 선생 집에는 배나무가 한 그루 있었습니다. 가을이 되면 먹음직스러운 배가 탐스럽게 열리곤 했지요. 이웃집 개구쟁이는 그 배가 탐이 납니다. 돌을 던져 배는 떨구었으나 배가 담장 안으로 떨어져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돌을 던지던 개구쟁이는 퇴계 선생에게 들키게 됩니다. 이제 죽었구나 하는 순간에 퇴계 선생은 머슴을 불러 이렇게 말하지요. "마당에 배가 많이 떨어졌구나…. 이 배를 이웃집 아이에게 가져다주도록 하여라." 혼날 줄만 알았던 아이는 뜻밖의 호의에 감동합니다. 그러고는 다시는 이웃집 물건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지요. 갓난아이의 해맑은 웃음을 보면 근심 걱정이 사라집니다. 아마도 천사가 있다면 아이들의 함박웃음을 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집니다. 살아오면서 온갖 세상 풍파에 시달렸기 때문일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천진한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해맑은 어린아이의 웃음에서는 성냄을 찾아볼 수 없고 초췌한 노인의 얼굴에서는 밝은 미소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넉넉한 마음에서 여유가 나오는 것이며 너그러움 속에서 행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따뜻함으로 치장하고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안재성 작가가 쓴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왜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일까요? 박열은 동경 유학 중 기존의 독립운동에서 더 나아가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서 일왕 체제를 부정하는 활동을 벌이다가 1923년 9월 5일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1945년 10월까지 22년 동안 긴긴 옥중 생활을 하였습니다. 일왕을 암살하려고 폭탄을 구입하려는 등 일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불온한 투사였기에 작가는 박열에게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까요? 알고 봤더니 박열 혁명가는 제 고등학교 대선배님이시네요. 고교 시절 박열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일본 군대를 환송하는 정류장에서 ‘일본 만세(萬歲)!’라고 외쳐야 할 것을, ‘일본 망세(亡歲)’라고 외치며 스스로 위로했다고 하네요. 1919년 10월 무렵 동경으로 유학을 온 박열은 흑도회를 창립합니다. 아나키즘을 상징하는 검정색을 넣어 이름을 지은 것이라고 하네요. 흑도회의 강령 가운데 하나는 이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고정된 주의가 없다. 인간은 일정한 틀에 박혀버리면 타락하고 멸망하기 마련이다. 마르크스나 레닌이 무엇이라 하던 크로포트킨이 무엇이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불볕더위 속에 기다린 가을바람이 살랑 불고 매미가 떠난 푸른 숲에서 귀뚜라미 세레나데 울리면 가을이 성큼성큼 다가옵니다. 지붕에 뜬 하얀 달덩이 대청마루에 늘린 빨간 고추 알밤송이 툭툭 떨어진 숲속에 다람쥐가 쪼르르 나무를 타면 가을만찬이 분주합니다. ... 박소정, <가을은 당신의 선물입니다> 가운데서 "가을이구나. 드디어 아들 며느리도 손주들과 함께 모이는구나. 그동안 부쩍 큰 손주들, 이미 가슴을 넘긴 키를 몸으로 대어보고 칭찬을 해주자. 애들도 입맛이 살아나 잘들 먹겠구나. 그 애들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이더라?" 지난달 한가위를 앞두고 우리 부부는 고민을 한참을 했다. 애들이 와서 하루건 이틀이건 자고 갈 것인데, 한가위 날 아침을 잘 먹고 나서 애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그네들이 못 보는 것은, 집 주위 산책길에 있는 밤나무에서 알밤을 주워보는 체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이미 알밤이 거의 다 떨어지고 땅에 떨어진 밤송이들도 짙은 갈색으로 변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애들에게 알밤이 들어있는 밤송이를 보여주고 그것을 발라보는 체험을 하게 해주면 좋을 텐데...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대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는 말씀이지요. 일에 능한 사람은 도구의 좋고 나쁨에 관계없이 완벽한 실력을 낼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당나라 때 유명한 서예가로는 우세남, 저수량, 안진경, 구양순 등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구양순이 제일 유명하지요. 지금도 서예 학원에서 구양순과 안진경을 필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구양순은 글씨를 쓸 때 붓과 종이를 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수량은 좋은 붓과 먹이 없으면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지요, 어느 날 저수량이 우세남에게 묻습니다. ''자네는 나와 구양순 중 누가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가?'' ''내 생각에는 구양순이 한 수 위인 것 같네. 그는 어떤 종이에 어떤 붓을 가지고 쓰든 마음먹은 대로 쓰는데 자네는 붓과 종이를 가려 쓰지 않는가?'' 이에 저수량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유능한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면 연장이 좋아야 합니다. 목수가 연장을 좀처럼 빌려주지 않는 것이 그런 까닭이지요. 악기 중에서 값이 가장 천차만별인 것은 현악기 종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10) 먼 길을 걷고 돌아와 천천히 매일 서귀포를 걷는다. 길을 내고 걷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길 위의 모래 한 알, 길섶에 사는 풀잎처럼, 풀꽃처럼 소소한 그 길이 소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제주 ‘올레길’. 전국에 올레 열풍을 불러온 ‘제주올레’의 창시자 서명숙이 지은 이 책, 《서귀포를 아시나요》는 서귀포에서 나고 자란 그녀의 추억을 가득 담고 있다. ‘올레’는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좁은 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그녀가 구석구석 길을 닦고 빛을 내기 시작하며 전 세계에 알려졌다. 늘 거기에 있었던 ‘올레’, 그러나 그것을 발견한 것은 그녀만의 독특한 감성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 무심히 보던 현무암조차 수십 년이 흐르고 보니 너무나 멋진 ‘신의 붓질’로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현무암의 빛깔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나 역시 이러한 경탄에 깊이 공감했다. (p.37) 제주에 살면 살수록 제주의 풍경을 완성하는 마지막 신의 붓질을 현무암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검은 현무암은 제주에 피고 지는 그 모든 꽃과 나무와 덩굴 식물들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미라보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들 사랑도 흘러간다 내 마음속 깊이 기억하리 기쁨은 언제나 고통 뒤에 오는 것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자 우리의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한 눈길의 나른한 물결이 흘러가는 동안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사랑은 지나간다 흐르는 강물처럼 사랑은 가버린다 이처럼 인생은 느린 것이며 이처럼 희망은 난폭한 것인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나날이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흘러간 시간도 옛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데 미라보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머문다 기욤 아폴리네르(1880~1918)의 <미라보다리>입니다. 누구나 다 아는 시를 왜 새삼스럽게 얘기하냐고요? 시에 얽힌 이야기에 흥미가 있어서입니다. 물론 이 시를 좋아하는 이들은 시에 얽힌 이야기도 잘 아시겠지만, 시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새로 알게 되어 입이 근질근질한 한 실없는 남자의 이야기도 너그럽게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미라보의 다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