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새만금 해창 갯벌에서 진행된 세계 잼버리 대회가 폐영식 뒤에도 후폭풍이 만만치 않다. 입지 선정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산 지원, 업자 선정, 지원 체계, 책임 소재 등등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계속 보도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총체적인 부실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새만금 사업은 필자가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추적해 온 사업이다. 이 글에서는 새만금 사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검토해보고 새만금 갯벌의 미래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2005년 어느 날, 전북발전연구원(현 전북연구원)에 근무하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당신은 고향이 전주인데 왜 그렇게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느냐? 애향심을 발휘해서 새만금 사업이 완성되도록 도와 달라.” 나의 답변은 이랬다. “내가 고향을 사랑하기 때문에 새만금 사업을 반대한다.” 단군 이래 최대의 토목사업이라는 새만금 간척 사업은 1987년 12월 11일에, 대통령 선거를 불과 5일 앞두고 노태우 후보가 전라북도 도민들의 표를 의식하여 선거 공약으로 발표하면서 탄생하였다. 새만금(새萬金)이라는 이름은 김제평야의 다른 이름인 만금평야(만경평야의 ‘萬’과 김제평야의 ‘金’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오늘날 해외여행이라고 하면 집집마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때지만 80년대 초반만 해도 좀처럼 가기 어려운 특별한 일이었다. 방송국 기자생활을 하고 두 번의 해외 특파원으로 나라 밖를 많이 다닌 필자만 해도 첫 나라 밖 방문은 입사 후 6년이 지난 1983년이었다. 당시 유네스코 한국본부가 우리의 대학생 청년들이 나라 밖 공부를 해야 한다고 일본역사문화탐방단을 만들었는데, 필자는 이 탐방단의 일원으로 참여해 1983년 8월 17일에 부산에서 시모노세키로 배를 타고 들어가 첫날을 야마구치(山口)현 하기(萩)라는 도시에서 하루를 묵었었다. 그런데 지난 초여름 부산의 친구들이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무선 동호인 연례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기시에서 하룻밤을 묵고 간다고 해서 필자도 동행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가 해외탐방 첫날을 보낸 곳인데 이번에 꼭 40년 만에 다시 가게 되는 것이다. 하기라는 곳은 일본이 우리 동남해안과 얼굴을 맞대고 있어서 임진왜란 때 일본이 울산과 부산지역에서 차출한 우리의 도자기 장인들을 배로 싣고 곧바로 도착한 곳이고, 이때 끌려간 분들이 가마를 연 것이 유명한 하기요(萩窯)이다. 또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간송(澗松). 산골에 흐르는 물, 그리고 푸른 소나무를 뜻하는 이 말은 어느새 우리 문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간송은 물려받은 큰 재산으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는 데 열과 성을 다한 전형필 선생의 호다. 오늘날 국보급 문화재를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우리 미술사에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간송이 그 모든 것을 지켜내지 않았더라면 요원했을 일이다. 최석조가 쓴 이 책 《조선의 백만장자 간송 전형필,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는 ‘간송미술관’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간송 전형필의 일생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간송에 막 관심을 가진 청소년이 읽기에도 좋다.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수많은 그림과 도자기가 알고 보면 간송의 엄청난 노력으로 이 땅에 남아있음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서울에서 아버지 전영기,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큰형 형설은 벌써 열다섯이었으니, 정말 늦둥이였던 셈이다. 아들이 귀한 집안이었기에 형필은 자식이 없던 작은아버지 전명기의 양자로 들어갔고, 온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선대 할아버지 때부터 배오개 장터(지금의 종로)에서 장사한 그의 집안은 나라에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만이불일(滿而不溢)’ "가득 차면서도 넘치지 않는다."라는 말씀입니다. 승진하여 윗자리에 오르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 넘치지 않는 지혜가 있다면 위태롭지 않습니다. 그것이 오래도록 존귀함을 지켜주지요. 공자는 인(仁)을 강조했습니다. 이 글자를 파자하면 人이 두 개가 나옵니다. 곧 두 사람이라는 의미가 되지요. 이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보다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높은 지붕 위에 올라간 새끼 염소는 늑대가 올라올 수 없는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늑대를 놀려댑니다. 늑대는 새끼 염소를 올려다보며 말하지요. "이 철딱서니 없는 것아. 네가 지금 우쭐거릴 수 있는 건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네가 서 있는 그 자리 때문이란다." 윗자리에서도 겸손하게 아래를 올려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중국 전국시대 오기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출세를 위하여 아내를 죽인 무자비함 때문에 역사적으로 폄훼된 인물입니다. 지금도 오기 부리지 말라는 말씀이 있고 보면 오기라는 인물이 그다지 좋은 평을 받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그의 장수로서의 행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노회찬 평전》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동안 노회찬 재단에서는 ‘인간 노회찬’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노회찬평전 기획위원회를 구성하여 노회찬의 말과 행적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광호 씨가 글로 엮어내는 작업을 하여, 4년 만에 평전이 세상에 나왔네요. <미디어 오늘>, <레디앙> 등의 편집자였던 이광호 씨는 이를 위해 노회찬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을 만나 대담을 하였답니다. 사실 이광호 씨는 노회찬과는 살아생전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답니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적임자라 생각하여, 평전 기획위원회에서는 그에게 집필을 의뢰한 것이랍니다. 이광호 씨는 머리말에서 노회찬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랑을 실천한 현명한 무신론자, 마음이 따뜻한 유물론자, 마키아벨리스트와는 거리가 먼, 순진한 구석이 있었던 정치인, 과묵한 달변가, 변화에 열려 있고 첨단을 즐길 줄 아는 원칙주의자, 베토벤ㆍ차이콥스키ㆍ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좋아한 음악 애호가, 박학다식을 뽐낸 음식 마니아, 요리를 즐긴 남자, 소년의 호기심을 지닌 어른,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비판받지 않았던 페미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한낮 기온이 30도를 넘고 아침에도 20도를 넘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더니 드디어는 숲의 나뭇등걸과 가지에 자리 잡은 너희들의 울음소리가 스테레오 합창처럼 들려온다. 몇 년 새 나무들이 커져서 거기에 있는 너희들이 모습이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지만, 소리는 엄청나게 크고 잘 울린다. "맴-맴-맴-맴-매애앰-"을 반복하며 울다가 마지막에 음이 높아지며 ''매애↗애애애...''를 길게 내는 것을 보니 너희들은 참매미일 것이구나. 마지막에 뒷다리를 들어 올리고 소리 내는 것도 그렇고. 그 옆에는 "르르르르르르르르르- 츠- 와아치- 르르르르스피이 - 피르빌빌빌빌빌 피오 스-피오츠츠츠스스…." 이런 소리를 내는 것이 필시 애매미일 것이다. "쓰-름 쓰-름" 쓰름매미 소리도 들린다. 참매미 소리가 가장 대표적이긴 하지만, 너희들이 내는 소리는 일일이 옮겨적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숲의 앞과 뒤에서 한꺼번에 울어대니 이것이야말로 매미 교향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우리 인간들이 너희를 반긴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너희들이 땅속에서 애벌레 상태로 5년 전후의 긴 시간을 보내다가 한여름 기온이 올라가면 허물을 벗고 매미가 되어 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경주 최부잣집. 부를 일구는 것은 어렵다. 창업보다 수성이 어려운 것처럼, 부를 이어가는 것은 더 어렵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은 그렇게 부를 쌓으면서도 세간의 칭송을 받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자를 질시한다. 돈과 권력에는 그만큼 시샘하는 눈길이 따라붙는다. 그렇기에 부와 권력을 지닌 이들은 그 눈길을 피해 더 높은 곳으로 가고, 공고한 자신만의 성채를 짓는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지키려 한다. 황혜진이 쓴 책, 《경주 최부잣집은 어떻게 베풀었을까?》는 그와 반대로 절제와 중용을 실천하며 사람을 존중하고, 사람들 속에 머물렀던 경주 최부잣집의 이야기를 읽기 쉬운 문체와 그림으로 담아냈다. 경주 최부잣집이 대를 이어 실천했던 부에 대한 철학, 진정한 명문가 정신이 녹아들어 있다. 최부잣집에는 여섯 가지 가훈이 있었다.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이는 부와 권력을 동시에 탐하지 말라는 경계였다. 부가 생기면 권력이 탐나고, 권력이 있으면 부가 탐나는 것이 인지상정이건만 부를 지키고자 한다면 최소한의 양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벼슬만 하고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큰 벼슬은 욕심내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고위공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맹자의 진심장에 ‘농단’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익이나 권력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농단(壟斷)이라고 합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곡식을 가지고 와서 모피와 바꾸거나 또는 생선을 소금과 바꾸는 물물교환의 시장이 있었습니다. 이때 어떤 남자가 돈을 벌려고 진기한 물품을 가지고 와서 약간 높은 언덕의 깎아지른 곳[농단(壟斷)]에 자리를 깔았습니다. 그곳은 사방이 다 잘 보이는 자리여서 어떤 물건이 비싸게 거래되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지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이 남자는 농단을 차지하여 물건을 팔아 큰 이득을 얻었습니다. 농단은 언덕 농(壟)자에 끝단(斷)을 써서 언덕의 끝이라는 평범한 용어여서 그 말 자체에는 좋고 싫음의 감정이 들어있지 않지만 농단을 차지한 상인의 교활함을 이유로 불편한 말이 되었습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와 소, 말 등은 원래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던 것들이지만 인간에게 길들기 시작하면 자연으로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새장에서 일생을 보낸 새가 하늘을 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지요. 집에 포메라니안 종의 강아지를 기르고 있습니다. 이놈은 같은 견종의 강아지보다 주인인 사람을
[우리문화신문=일취스님(철학박사)] “내가 허약한 가설 위에 지어 올렸던 환상의 성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그 후에는 무감각하고 밋밋한 평면이 덩그렇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 《상실의 시대》 가운데서- 어느 날 내가 기대했던 어느 것 하나가 환상이었음을 깨닫곤 한다. 복권을 사놓고 긴장된 마음으로 추첨 일을 기다렸다가 추첨이 끝나자, 주먹 안에 무참하게 뭉개진 종잇장처럼 그 시간까지 기대했던 꿈도 처절하게 뭉개진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꿈이 어느 때는 그저 생각만으로 지어 올린 가설과 논리들의 군상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다가설 수 없는 여러 색깔의 꿈의 반란을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꿈이 없는 삶이란 망막한 사막과 같다. 한 여자가 양계장에서 하루 일을 해주고 그 대가로 달걀 한 판을 받았다. 달걀판을 머리에 이고 부픈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큰 부자가 될 거라는 꿈을 꾸며 길을 걸었다. “이 달걀을 부화시키면 병아리 30마리가 된다. 30마리 병아리를 다섯 달 동안 잘 키우게 되면 그 닭들이 수많은 알을 낳게 되고, 그 알로 또다시 병아리를 부화시키면 닭은 엄청나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때 바다에서 23번 싸워 23번 모두 승리한 불패의 영웅이란 사실은 우리 겨레로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한산도 해전, 명랑해전, 노량해전을 3대 해전으로 꼽지요. 한산도 해전은 남해를 돌아 서해로 올라오려는 왜군의 전략을 좌절시키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데서, 명랑해전은 13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왜군 함대와 맞서 절대적인 열세를 치밀한 전략과 울돌목의 지형을 이용하여 승리로 이끈 명 대첩이기에 3대 해전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노량해전은 잘 아시다시피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마지막 해전으로 이때 적선 200여 척을 격파하고, 100여 척을 나포한 최대 전과를 올렸기에 3대 해전에 들어갑니다. 이 가운데서 특히 한산도 대첩은 바다를 장악하고 호남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데서, 3대 해전에서 나아가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힙니다. 아니, 아예 임진왜란을 넘어서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대첩으로 꼽힐 정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산도 대첩은 이에 더하여 학익진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적의 수군을 포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