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웃는 낯에 침 뱉으랴. 웃는 낯에는 함부로 대하기 힘든 힘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은 웃는 얼굴이라는 말처럼, 웃음에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신비한 치유의 힘이 있다. 우리 문화유산에는 유난히 웃는 표정이 많다. 얼핏 보면 근엄하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은은한 웃음기가 배어있다. 이런 잔잔한 웃음기가 우리 문화유산을 보면 볼수록 매력 있게 만든다. 김은의가 쓴 이 책, 《웃음꽃이 핀 우리 문화유산》은 우리 문화유산에 나타난 웃는 표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 책이다. 첫째 마당, ‘유형 문화유산 속 웃음꽃’에서는 그윽한 불상의 미소, 지붕 위 웃는 기와, 하회탈 등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는 웃는 표정을 다뤘다. 둘째 마당, ‘우리 그림 속 웃음 보따리’에서는 무덤 벽화, 민화, 풍속화에 나타난 웃는 표정을 살펴본다. 셋째 마당 ‘무형 문화유산 속 웃음 바다’에서는 판소리와 탈춤에 나타난 해학적인 장면을 집어낸다. 마지막으로 부록에서는 ‘세계 속 웃음꽃’으로 세계 곳곳의 문화유산에서 나타난 웃는 표정을 조명한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난 달신의 미소다. 옛 고구려 영토였던 중국 길림성 집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고교 선배 이인람 변호사가 《야만의 시간》이란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카톡 문자를 보내오셨습니다. 선배는 하늘이니까, 명령을 어기면 안 되겠지요? 책의 부제는 ‘반국가단체 만들기에 희생된 한통련의 50년’입니다. 한통련이 1973년 설립된 단체이니까, 반국가단체 만들기에 희생된 한통련의 50년이라면, 지금까지도 한통련은 반국가단체라는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네요. 이런! 그동안 한통련 연계된 재일교포 간첩사건들이 재심에서 무죄가 나와, 한통련 문제도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제가 무심했었네요. 한통련은 1973년 8월 15일 재일교포들이 설립한 단체입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영구집권을 꾀하는 때라, 자연히 조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뜻있는 재일교포들이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단체를 만든 것이지요. 설립 당시에는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라는 이름으로 발족했는데, 1989년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한통련은 출범 당시부터 김대중 대통령(DJ)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단체입니다. 아니 한통련 설립에 DJ가 깊숙이 관여되어 있습니다. DJ는 그 무렵 교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황희 정승의 일화입니다. 하루는 두 여종이 상대방이 잘못했다며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두 여종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은 후 한 여종에게 '네 말이 옳다' 하였습니다. 그러자 다른 여종이 억울함을 호소하자 역시 '네 말도 옳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이 '이 사람의 말도 옳고 저 사람의 말도 옳다니 줏대가 없으신 거 아니요?' 황희 정승은 '당신의 말도 옳소'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모든 편의 손을 들어주어 누구하고도 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지요. 썩은 과일을 계속 도려내다 보면 먹을 것이 남지 않고, 미운 사람을 다 걸러내고 나면 쓸 사람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적당히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것을 한문으로 표현하면 중용(中庸)입니다. 쉬운 한자로 다시 표기하면 中用인 것이지요. 즉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알맞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이 부족하면 상대는 원망하게 되고, 남에게 베푸는 말과 행동이 지나치면 상대는 부담스러워합니다. 그 과(過)와 불급(不及)의 중간이 중용인 셈이지요. 그렇다고 남의 눈치만 보며 남의 기분을 맞춰줘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중용은 사람에 따라 삶의
[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충청남도 서산만 간척 사업은 1980년 5월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만 해도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갯벌을 논으로 만들면 경제성이 있다고 보았다. 현대건설이 공사를 하던 중 1984년 2월에 방조제 공사의 마지막 물막이 단계에서 난관에 부딪혔다. 9m에 달하는 조수 간만의 차와 초당 8.2m의 빠른 유속으로 승용차만 한 바윗덩어리도 흔적 없이 떠내려가기 때문이었다. 이때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정 회장은 23만 톤 급 폐유조선(길이 322m, 높이 27m)을 울산에서 끌고 와서 물을 가득 담아 가라앉혀 물막이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고정 관념의 틀을 깨는 이 기발한 공법은 ‘정주영 공법’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건설계의 찬사를 받았다. 서산 간척지는 1986년 5월에 시범 영농을 개시했으며, 1995년 8월 14일 공사기간 15년 3개월이라는 대역사(大役事)를 마감했다. 정주영 회장은 1998년에 서산 간척지(현대그룹 서산농장)에서 기른 소 1,001마리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방북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어릴 적 아버지가 소를 팔아서 갖고 있던 돈(70원)을 훔쳐 가출하여 사업을
[우리문화신문=김상아 음악칼럼니스트] “보리밥이나 잡곡밥은 먹지 않고 쌀밥만 먹었으니 그렇지.” “지적질” 전문가인 아내가 탁배기잔을 내려놓으며 일갈(一喝)했다. 우리는 종종 아내가 빚은 탁주 한 잔과 음악으로 산골살이의 고단함을 달래곤 하는데, 음악을 자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만 골라 듣게 된다. 그러다 보니 목록(레퍼토리)이 뻔하다. 추리고 추리기 때문이다. “판이 천장이나 만장이나 들을 게 없기는 매한가지”라 투덜대니까 아내가 놓칠새라 비수를 꽂은 것이다. 씹던 안주가 목에 걸리는 듯했다. 가슴에서 덜컥 소리가 나고 머리에서 “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랬나? 내가 그렇게 되었나? 혈당을 낮춘답시고 현미밥을 주식으로 삼고 매식을 할 때도 보리밥집을 찾아 뒤지면서도 정작 음악은 “쌀밥”만 골라 들었구나. “이눔아야! 전깃세 생각도 쫌 하그라.” 음악실에는 이미 빈 소줏병 몇이 나뒹굴고 있었고 시각은 벌써 새벽 두 시를 넘고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나는 음악 없이는 술을 마시지 못한다. 대폿집에서 마시는 날에도 마지막은 늘 음악실에서 술자리를 마쳤다. 어느 업소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그건 불문율이었다. 그러니 가는데 마다 주인들 인상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 저 멀리 동해바다 외로운 섬 오늘도 거센 바람 불어오겠지 조그만 얼굴로 바람 맞으니 독도야 간밤에 잘 잤느냐 독도에 관한 뉴스, 일본이 독도에 대해 뭐라고 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저는 언제부터인가 이 노래 '홀로 아리랑'을 흥얼거리게 됩니다. 1990년 무렵부터 대중가수 서유석의 노래로 알려지기 시작했지만 원래 한돌이란 분이 작사ㆍ작곡한 이 노래는 가사와 분위기 때문에 대중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고 2005년 조용필 씨의 평양공연에서 북한 측이 앙코르곡으로 이 노래를 요청해 부른 이후 더욱 국민의 사랑을 받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저는 1980년대 후반 방송기자로 일할 때 수원의 서지학자인 이종학 선생이 일본의 독도침략 야욕에 맞서기 위해 발굴한 독도 관련 귀중 자료들을 뉴스로 전하는 과정에서 독도문제를 좀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래서 일본의 소유권 주장에서 지켜내야 하는 우리의 소중한 영토라는 생각에 이 노래가 더욱 가슴에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독도는 많은 국민처럼 꼭 가 보아야 할 대상이 되었습니다. 지난주 11월 21일은 ‘독도대첩의 날’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일본은 한반도의 전란을 틈타 세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219쪽) 등잔과 관련하여 또 다른 속담은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게 있는데 등잔은 방을 환히 밝혀 주위를 잘 볼 수 있게 하지만, 정작 등잔 밑은 그림자가 져 보기 힘들지요. 곧 가까이 두고 먼 곳만을 헤맬 때 쓰는 말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처럼, 이리 좋은 문화를 가까이 두고 먼 곳을 찾아 헤맸다. 외국문화는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서도, 정작 한국문화에는 무심했다. 이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우리문화에 이토록 아름다운 뜻이 숨어있었다는 걸, 그리고 귀한 우리문화를 그동안 잘 몰라서 무심하게 대했다는 것을. 이 책, 《한국인이 알아야 할 한국문화 이야기》는 지은이 김영조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보내는 〈날마다 쓰는 우리문화 편지〉 가운데 한국인이 ‘제대로’ 한국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내용을 가려 뽑은 책이다. 필자 역시 저자의 숱한 편지를 탐독한 끝에 한국문화와 더 가까워졌고, 요즘도 우리문화 편지를 날마다 읽으며 한국문화를 배워가고 있다. 한국인이지만 이처럼 따로 배우지 않으면, 어쩌면 외국인보다도 더 과문할 수 있는 것이 우리문화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참 반갑다. 제1장 명절과 세시풍속, 제
[우리문화신문=정운복 칼럼니스트] 실학자 이덕무는 서자 출신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한 벼슬 이상은 오를 수 없는 신분이었기에 좌절감 또한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간서치(看書痴)’라고 표현합니다.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이지요. 그도 한때 광흥창에서 벼슬을 합니다. 광흥창은 조선시대 녹봉을 주는 창고입니다. 조선시대 관리들은 녹봉을 받았는데 월에 정기적으로 받는 것을 봉(俸)이라고 하였고 부정기적으로 보너스처럼 받는 것을 녹(祿)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지급하는 곳이 광흥창이었던 것이지요. 이덕무의 호는 청장관(靑莊館)입니다. 그의 문집이 《청장관 전서》인 이유입니다. 청장은 왜가리과 해오라기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해오라기는 강이나 호수에 살면서 먹이를 쫓지 아니하고 제 앞을 지나가는 것만 쪼아 먹는다고 합니다. 곧 이덕무 호인 청장관에는 욕심을 부려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는 청백함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덕무는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더러는 해가 저물도록 식사를 못 한 적도 있고 더러는 추운 겨울에도 온돌에 불을 지피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간혹 다른 사람들이 녹봉이 적지 않느냐고 물으면 그는 이렇게 답하곤 했지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박노해 사진 에세이집 《올리브 나무 아래》가 나왔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박 시인은 그동안 분쟁지역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 팔레스타인, 쿠르드족, 아프카니스탄, 라틴아메리카 등 지구촌 구석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의 진솔한 삶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와 사진 에세이집을 냈고, 또한 전시회도 열었습니다. 이번 올리브 나무 아래》는 6번째 사진 에세이집입니다. 제목에서 짐작하듯이 이번 사진 에세이집은 올리브 나무와 연관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왜 올리브 나무일까요? 서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분쟁 현장을 다니다, 나도 많이 다쳤다. 전쟁의 세상에서 내 안에 전쟁이 들어서려 할 때, 나는 절룩이며 천 년의 올리브나무 숲으로 간다. 푸른 올리브나무에 기대앉아 막막한 광야를 바라보며 책을 읽고 시를 쓰다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아이들과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라 눈물짓다가, 올리브나무 사이를 걸으며 다윗처럼 돌팔매를 던지기도 하고, 저 아래 올리브를 수확하는 농부들을 거들다가 돌샘에서 목을 축이고, 양떼를 몰던 소녀가 따다 주는 한 움큼의 무화과를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약 한 달 동안 미국에 나가 있다가 돌아온 뒤 필자는 집 바로 뒤에 있는 작은 절에 가서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오게 된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집을 나갔다가 탈 없이 다시 돌아온 것이 고마운 것이다. 그 고마움 속에는 집 나간 불상에 관한 법원의 확정판결이 10여 년 만에 마침내 이뤄진 데 대한 안도와 감사함도 들어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약 한 달 전쯤인 10월 26일 우리 대법원이 일본 대마도 소재 관음사(觀音寺)에서 절취되어 국내에 들어와 있던 금동관음보살좌상의 소유권이 대마도의 절에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불상이 일본으로 되돌아가게 된 사정을 말한다. 이 판결이 난 10월 26일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이 난 날이어서 이와 관련된 뉴스가 많이 난 날인데 그런 뉴스 속에서 이날 대법원에서 낸 이런 판결이 나라 밖에 있던 필자에게는 아주 의미 있게 생각되었기에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우리 국민 몇 사람이 2012년 10월 6일경 대마도 관음사(觀音寺)에서 금동보살상을 훔쳐서 국내에 밀반입하다 검거되어 범인들은 유죄판결을 받았고 불상은 압수된 사건이 있었다. 이후 그 불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