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유광남 작가] 하다부족의 두더지 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우린, 둘이 왔소. 족장의 명령으로 날 죽이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냥 둘이 하다부족을 지키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우린 마을을 떠날 수가 없어서...온 것이다. 일패공주가 재촉했다. 더 이상 들어야 할 이유 같은 것은 없어요. 하다부족을 쓸어버리면 되는 거니까. 감히 우리에게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했다는 말이지? 김충선은 만류했다. 하다부족의 전체 뜻이 아니라면 공연한 희생이 늘어날 뿐이요. 하다부족은 부족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하지 않았소? 그 때문에 우리의 혼사가 늦어지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나요? 김충선과의 사이에서 이견이 일어나자 일패공주는 불쑥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진심을 발설하고 말았다. 여인으로서는 먼저 말을 꺼내기가 부끄러운 고백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충선은 그녀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난 이 자를 좀 더 심문 하는 게 좋다고 생각되오. 일패공주는 화가 치솟았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럽시다. 김충선은 일패의 반응에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고 두더지 인간 은서에게 물었다. 부족의 명령이 아니라 그대들 둘이서만 공모(共謀)한 암습
[한국문화신문=유광남 작가] 하다부족의 은서는 김충선의 완력을 당하지 못하고 주르르 당겨졌다. 그때 아란의 비수는 김충선의 요혈을 노리고 찔러 들어왔으나 오히려 은서의 어깨와 가슴을 찌르는 꼴이 되었다. 김충선의 절묘한 동작에 아란은 동료를 찌르고만 것이다. 이, 이런? 아란은 비수를 손에서 놓치며 부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비수는 은서의 가죽옷을 뚫고 박혀버렸다. 금세 핏물이 고여 흘렀다. 패륵이 놀란 눈으로 누나 일패공주에게 물었다. 방금 전에 김장군이 보여준 맨손 무예는 무엇입니까? 저것도 배우고 싶습니다. 사부님에게요! 오오, 정말 대단했어요. 안돼! 아란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들어서 은서를 부축했다. 얼굴색도 거무스름한 괴인 은서는 눈을 껌벅였다. 아...파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내가 널 찌르다니! 나...... 죽게 되나요? 아니야. 널 이렇게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어. 그래도 피가 나...는데.......피가 나면 죽는 거잖아요. 괴인답지 않게 하다부족의 두더지 은서는 어린애 응석을 부렸다. 아란은 그런 은서를 상대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가 널 이렇게 만들다니! 내 손으로 널 찔렀어? 내 손으로 말이야. 믿을 수가 없어. 미안
[한국문화신문=유광남 작가] 총을 들고 등장한 인물은 패륵이었고 그 뒤를 따르던 일패공주가 괴인의 정체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김충선은 그들 남매가 동시에 나타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덕분에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사부님, 이 제자의 솜씨가 놀랍지 않습니까? 패륵의 큰소리에 일패공주가 콧방귀를 뀌었다. 발사된 총에 그녀의 칼이 우연히 맞았을 뿐이지. 이것이야말로 장님이 문고리를 잡은 격이야. 그것은 사실이었다. 본래 패륵은 김충선을 기습한 대두도의 여인을 겨냥 했지만 총알은 그녀를 비켜서 칼을 동강낸 것이었다. 김충선은 새벽에 등장한 이유를 그들 남매에게 묻고 싶었지만 일패공주는 대두도의 여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일패공주의 입에서 앙칼진 외침이 새어 나왔다. 누구의 사주를 받고 건주여진의 손님을 노린 것이냐? 대두도의 여인도 만만하지 않았다. 내 입에서 나오리라고 믿는 것은 아니겠지? 건방진 계집이로구나. 일패공주는 갑자기 호각을 입에 대고 불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방에서 병사들이 몰려들었다. 병사들은 일패공주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행동했다. 잡아라. 항복하지 않고 반항하면 죽여도 무방하다. 창검을 쥐고 있는 병사들이 이제는 대두도가 부러져
[한국문화신문=유광남 작가] 대두도의 여인은 모호한 말을 던지면서 재차 공격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김충선의 가슴과 복부를 노리고 쇄도해 들었다. 대두도의 칼끝이 성난 뱀처럼 달려들자 김충선은 다시 뒤로 다섯 걸음이나 빠르게 물러났다. 그녀는 이번에 펄쩍 도약하면서 대두도를 수직으로 뻗어왔다. 연약해 보이는 여인이었으나 이번 공격은 태산도 붕괴시킬 것만 같은 힘이 느껴졌다. 물러가라! 김충선은 간발의 차이로 상대의 칼날을 무위로 돌리는 한편 빙글 몸을 돌리면서 손을 뻗어갔다. 상대방의 맥(脈)을 움켜쥐기 위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대두도의 여인 또한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는 칼과 함께 허공으로 원을 그리면서 민첩하게 빠져 나갔다. 역시 제법이군. 그녀의 입에서 뱉어진 말이지만 김충선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인정한다. 너의 칼솜씨는. 그렇지만 이런 암습은 곤란해. 미안하다. 다른 방도가 별로 없어서. 이대로 물러간다면 용서하지. 감히 누구의 땅에 들어와서 누굴 용서한다는 것이냐? 넌 여진으로 와서는 안 되는 위인이었다. 어차피 내 손에 죽어야 할 운명이었어. 대두도의 여인이 다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보다 강력한 수법을
[한국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김충선은 누르하치와의 여러 차례 회동을 통하여 조선에 대한 여진의 정책을 조율하였으나 최종적인 순간에서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충선은 이순신과 여진의 칸 누르하치의 대면을 성사 시키고자 노력하였다. 김충선이 요구 했었다.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만나 주십시오. 여진의 칸 누르하치가 대답했다. 그러하마. 이순신과 더불어 천하를 논하겠다. 이런 대화를 주고받은 지 한 달이 넘어갔으나 아직도 누르하치에게서는 시원한 대답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김충선은 내심 인내하고 있었으나 조바심이 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새벽에는 야릇한 꿈까지 꾼 상태였다. 오늘은 기필코! 김충선이 자신에게 다짐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문득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미모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이국적인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동그스름한 외모에 낮은 콧날과 도톰한 뺨, 반달 같은 눈을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조선 여인과 같았다. 그러나 손에 쥐고 있는 것은 여진의 전사들이 주로 이용하는 두툼한 대두도(大豆刀)였다. 여인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가 물었다. 그대가 조선에서 왔다는
[한국문화신문=유광남 작가] 그럴 수가 있단 말이요? 곽재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변에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강경한 발언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조선 함대는 일본으로 진격합니다. 정도령의 신념어린 목청이 그렇게 아름답게 들릴 줄은 몰랐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눈물이 울컥 솟구쳤다. 이순신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균 또한 의기가 다르지 않았다. 장군의 의병들이 필요 합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일본 영토를 쓸어 봅시다! 곽재우는 의식도 하지 않았는데 목청이 미리 반응했다. 내가 앞장서리다! 일본군의 침략으로 조선 전체가 망가지고 피폐 되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부모를 잃은 고아들의 서러움이 천지에 널려졌고, 자식 잃은 부모들의 애절한 한이 하늘 끝까지 통곡으로 이어졌다. 전쟁의 참상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는 잔인함의 극치였다. 일본의 침략 야욕으로 인한 조선의 일대 비극을 되돌려줄 수 있다니! 곽재우는 소름 끼치는 흥분감에 빠져 들었다. 그런데 정녕 그럴 수 있는 겁니까? 이번에는 원균이 다소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왔다. 그의 커다란 눈에서는 의혹과 더불어 기대에 가득 찬 열망의 광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정도령은 그때 단호했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누구이기에 원균에게 그런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냐고 따지듯이 물었다. 이순신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곽장군께서 이 사람을 설득하러 오실 것이라 예언(豫言)했던 정도령입니다. 예언을 하다니요? 설마 그 가요? 그러합니다. 홍의장군이 달려와서 분명히 이 사람을 설득할 것이라 했습니다. 곽재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요? 어떤 내용이라고는 말하지 않던가요? 왜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홍의장군을 우리 사람으로 반드시 끌어 당겨야 한다고 주문을 했습니다. 역으로 설득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장군을 동반하지 못하게 되면 우린 희망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순신은 비장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다. 곽재우는 정도령이란 청년의 내력이 궁금해졌다. 원균 역시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호기심이 왕성하게 발동 되었다. 이순신과 곽재우가 각자 말했던 설득이란 어떤 내용인가. 원균은 잔뜩 귀를 기울였다. 귀하신 분들께서 어찌 여기서 이러고들 계십니까. 우선 자리를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울이 권하자 그때서야 이순신이 결례를 깨닫고 서둘렀다. 홍의장군의 방문에 이 사람이 흥분하여 잠시 정신을 놓고 말았습니다. 자리를 옮기십시다. 곽재우가 너털웃음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한정된 군사들의 수를 더 늘릴 수는 없습니다. 그 또한 판옥선의 무게와 속도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빠르기입니다. 적선에 비해서 무조건 날렵해야 합니다. 그 다음이 병장기입니다. 적의 혼을 빼놓을만한 신무기를 우리가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수를 상대로 이길 수 있는 필승의 전략입니다. 원균이 이 부분에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수군 병사들은 어떻소? 그들을 지휘하는 장수는요? 정도령이 빙긋 웃었다. 그것은 기본입니다. 원균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기본이라니! 일종의 모욕감을 느끼는 것으로 보여 졌다. 칠천량 패배의 굴욕이 되살아난 것 같았다. 장수로서 어쨌든 그는 철저한 패장으로 분류되어 군법에 의하면 참형감일 수도 있었다. 군관 나대용은 불안한 얼굴이었으나 이순신은 태연했다. 내가 그걸 모르고 있었군. 여태까지 기본이 되지 못한 장수였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어. 허어, 참으로 죄스럽군. 원균이 탄식을 토하고 있을 때 홀연 중후한 목소리가 선소 입구 쪽으로부터 들려왔다. 원장군이 그럴 리는 없소. 난 언제나 장군의 무용을 흠모해 왔으니까요. 곽재우가 성큼
[한국문화신문 = 유광남 작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으로 인하여 발생한 전쟁은 매우 급하게 전개 되었다. 전쟁준비를 총괄해야 하는 나고야의 성도 불과 6달 만에 건축하였으니 일본 군인들을 싣고 날라야 하는 일본군선 역시 충분한 시간을 두고 건조할 수는 없었다. 전투선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순신은 임진년의 경험을 통하여 조선과 일본 선박의 차이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순신이 확인하고픈 것은 판옥선의 완전한 개조였다. 신기전을 장착하는 것이 얼마나 유용하겠소? 정도령은 거침이 없었다. 대단한 성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대단한 성과라? 원균과 나대용, 이순신 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도령은 화차(火車)를 이용해 사용하던 육상의 신기전을 축소하여 판옥선에 설치 중이었다. 판옥선에는 주로 소형과 중선 신기전을 탑재할 것입니다. 화포에 비하여 무게가 가볍지만 성능이나 위력은 그 이상이 될 것입니다. 우선 근접전에도 매우 유용할 것이며 화살 끝에 설치 할 화약통이 폭발하게 되면 적들은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한 번에 칠 칠이 사십 구 발이 장착되어 발사됩니다. 판옥선에 몇 대가 설치되는 겁니까? 좌우에 각기 4대씩
[한국문화신문 유광남 작가] 이순신은 판옥선을 개조하고 있는 선소(船所)를 찾아가서 밤을 지새우며 몰두하고 있는 정도령과 군관 나대용을 위로하였다. 정도령의 지휘아래 나대용은 판옥선의 노(櫓)와 천자포(天字砲), 지자포(地字砲), 현자포(玄字砲) 등 화력이 강력한 총통(銃筒)에 대하여 대대적인 보강 작업에 돌입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의 화포는 최강의 무기입니다. 근거리와 장거리에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중률이 낮고 무게가 많이 나가서 판옥선에 부담을 주는 대형화포 천자는 철수 시키고 지자포와 현자포를 집중적으로 배치합니다. 그리고 육상에서 주로 사용하던 신기전(神機箭)을 도입하고자 합니다. 정도령의 설명에 이순신이 물었다. 신기전은 총통에 비해서 거리가 문제되지 않겠소?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함포 사격으로 적들을 견제해 왔는데요. 그것이 조선 수군의 전략이었고 그동안의 승리 요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이미 조선 수군의 전투에 대하여 연구를 하였고, 결과적으로 칠천량에서 대패를 당하고만 것입니다. 정도령의 지적에 대해서 이순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란히 동반했던 장수 원균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균이야말로 직접 전투에 참여 했던